오늘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해, 밖으로는 개화를 요구하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왕권 강화를 위한 서원 철폐, 동학과 천주교 탄압 등 여러 강력한 정책을 이끌었고, 명성황후를 직접 중전으로 간택하였으나 그녀와의 정치적 견해의 대립으로 인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엔 일본과 손잡고 명성황후의 암살 기도를 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가 살아온 과정 및 그가 펼친 정책들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보자.
흥선대원군의 가계도 및 유년, 청년 시절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는 원래 인조의 넷째 아들의 6대손 진사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영조의 손자였던 은신군이 후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 그의 양자로 입양되어 군의 작위를 받는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의 4대손의 딸이었다.
8세에는 맏형을, 12세에는 어머니를 17세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소년 시절 고아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난을 그리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고아가 된 후 생계유지를 위해 난을 그려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군의 지위를 받고 왕족이 되면서, 왕족에게 주는 관직을 맡으며 본인의 능력을 내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실권이 없는 관직을 맡다가 그 관직 중 유일하게 실무가 있는 종친부의 유사당상을 맡았다고 한다.
아들을 왕으로 만든 아버지, 흥선대원군
그는 궁에서 본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만들어 지냈고, 반감을 가지고 있던 안동 김 씨 가문에까지 본인의 세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병을 앓았고, 철종의 사망을 기다린 것인지 정보를 캐내기 위해 궁 내의 환관, 궁녀들을 포섭하여 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캐내고자 했다.
결국 후사를 보지 못하고 철종이 죽자, 차남 명복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군으로 봉하고, 그를 왕으로 즉위시킨 후 본인은 대원군이 되어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본격적인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원칙상,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는 것은 왕의 어머니, 대비의 역할인데 곧 대비는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을 보살피리라며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이 수렴청정을 하며 집권하게 된다.
그는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던 안동김씨안동김 씨 가문을 축출하고 문벌이나 당파를 배제한, 실력 위주의 인재를 등용하고, 일부 안동김 씨 가문의 양반들을 포섭하기도 하며 다양한 인술을 통해 본인의 세력을 확장하기에 나선다.
그는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면서, 본인의 종친들도 요직에 진출시키고, 서얼의 정계 진출도 확대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던 노론의 독재도 파하고 다양한 당파에 속한 관원을 고르게 등용하였다.
인사개혁을 단행하며 유교 정신을 내세워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명성황후 간택
이후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내, 왕비 간택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명성황후가 간택되었다.
당시만 해도 사람을 보는 눈이 매섭고 뛰어났던 그가 명성황후를 왕비로 선택한 데는 가설이 두 가지 전해진다.
첫째, 그가 명성황후의 본성을 몰랐을 리는 없고, 설마 시아버지인 본인에게 맞서기야 하겠느냐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
둘째, 당시의 명성황후는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매우 얌전한 행실을 가진 규수였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안동 김씨의 집권을 반대했던 흥선대원군에게 아버지나 형제가 없었던 명성황후는 매우 매력적인 왕비 후보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고종 5년 궁인 이 씨가 고종의 첫아들을 낳은 이후 그녀의 태도가 매우 달라졌다고 한다.
본격적인 집권 시기
흥선대원군은 조선 내부로 왕권을 강화하며 본인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외교적으로는 매우 폐쇄적인 태도로 정책을 펼쳤다. 조선 외부의 열강들은 조선의 개항을 압박하며 침략 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이들에게 대응한 흥선대원군.
1866년,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미국에서 온 제너럴셔먼호 방화 사건을 시작하여 프랑스의 병인양요, 미국의 신미양요를 비롯하여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이 여럿 일어났지만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결국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수교 거부의 뜻을 매우 명확히 알리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1869년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대정봉환을 알리는 문서를 보냈지만 이 또한 거절하였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본인이 불태운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가라앉아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한강에 옮겨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를 계기로 이와 똑같은 형태의 배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를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며 솜을 압축한 두꺼운 갑옷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것은 오히려 신미양요 때 병사들이 불에 타 죽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당시 참전 미군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탄압 정책을 펼치던 당시 일어난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인의 사망, 이를 명분으로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략한 사건인데, 명분은 사망한 선교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프랑스의 진짜 의도는 이를 빌미로 조선의 수교를 얻어내어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함이었지만 결국 이는 이뤄지지 못했고 오히려 천주교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쇄국정책은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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