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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정보/한국사 이야기

쇄국정책을 펼쳐 조선의 문을 걸어잠근 흥선대원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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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 이어 흥선대원군이 펼쳤던 정책 중, 외교정책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당시 조선은 많은 나라들이 통상을 요구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영국과 독일은 충청도 연안에서 통상 수교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역시나 이를 거절한 흥선대원군. 이 일로 인해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천주교를 박해하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인을 오랑캐라 칭하며 위와 같은 내용을 기록한 척화비를 세웠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인근 주민들의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들과 충돌이 발생, 배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사망하였다. 이를 빌미로 이 사건을 문책하기 위해 평양에 나타난 미국 군함이 나타났고, 이후 군함이 철수하자 흥선대원군은 조선이 미군을 격퇴했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년 뒤, 흥선대원군을 굴복, 통상을 강요하고자 강화도로 5척의 군함을 보내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이에 대응하며 전국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였다. 미국의 공격에도 끈질기게 통상을 거부하고 전투가 장기화하자 결국 미국은 철수한다.

척화비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의 외교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굳어졌으며,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척화비 자체가 대단한 뜻을 지닌 것도 아니고, 이런 번거로운 일이 아니더라도 명령을 전국에 배포할 수 있는 정도의 행정망은 충분히 건립된 상태에서 흥선대원군이 척화비에 집착한 것은 아마 척화에 대한 국민 의식을 상기시키고,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 탄압
처음부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매우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러시아 견제의 목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변심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강경정책을 펼치게 된다.
1866년 8천여 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사형당하고(병인박해), 이후 수만 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사형에 처한다. 프랑스는 조선 정부가 프랑스 천주교도들을 사형해 처했다는 것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강화도를 침략한 뒤 정족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에서 철수한다.

 



동학 탄압
천주교뿐만 아니라 조선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던 동학도 탄압하기 시작한다.
당시 동학의 교주였던 최제우를 처형하였는데, 이후 동학도들은 처형당한 교주의 무죄를 주장하며 교주 신원 운동을 펼쳤으나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개혁 실패
독재화
흥선대원군은 모든 정치적 결정권을 왕권에 집중시키고자 다양한 개혁을 실시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흥선대원군 본인의 세력만 확장하는 독재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실질적인 실무 결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은 왕의 고유 권한이었던 인사권마저 본인이 독자적으로 결정하였으며, 인사발령이 있을 때는 항상 미리 명단을 추렸고, 고종은 그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었다.

흥선대원군 탄핵
흥선대원군의 독재를 두고만 보지 않았던 명성황후와 고종은 보수적 유학파들을 앞세워 흥선대원군을 탄핵하고, 고종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출입했던 전용문은 폐쇄되었고, 운현궁에 은둔하였다가 양주군에 있는 별장에 칩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탄핵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신호탄으로 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기에 나선다.
이것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이 비록 독재를 하긴 하였으나 그 힘을 온전히 본인만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백성의 민생 안정을 위해 썼지만, 이후 정권을 장악한 민씨 가문은 그러지 못했고 권력을 남용하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다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이들의 부정과 부패로 백성들의 민심은 흥선대원군을 향해 돌아섰고, 명성황후의 온건 개항 정책에 반발했던 조선의 유림들은 다시 흥선대원군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 실권 이후
고종 축출 쿠데타
흥선대원군은 실권 이후 고종과 적대관계에 놓였고, 그는 기회만 살피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아들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한다.

개혁 무효화
흥선대원군이 그동안 왕권 강화를 위해 이끌어 낸 개혁들이 그가 실권한 이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철폐된 서원이 다시 부활되기 시작했다.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도 폐지되어 남인은 완전히 도태되었고, 이를 우려한 성균관 유생들은 이를 비판하기에 나섰지만 고종은 이를 모두 무시했다.

 



민승호 일가 암살 사건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 민승호의 집이 1874년 폭발하는 일이 생기는데, 이 사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함을 열어보니 구멍이 있었는데,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겉에 열쇠가 있어 열어보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열 살인 그의 아들은 할머니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고, 민승호는 높이 떴다가 떨어졌는데
온몸이 시커멓게 탄 채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다가 하루 만에 죽었다."
당일 사건에 대한 기록인데, 민승호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지만 죽으면서 운현궁을 두세 번 가리켰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그 배후로 지목하고 이에 대해 조사했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의 업적이 워낙 많은 탓에 흥선대원군을 주제로 한 포스팅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도 흥선대원군의 나머지 업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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