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두 번째 시간에는 그가 펼친 주요 정책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재 등용
흥선대원군은 한쪽 당파만을 지지하지 않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특히 안동김씨 가문이 세력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노론, 소론계 인사들을 조정에 등용하였으며 이후에는 정권에 거의 진출하지 못했던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고루 등용하였다.
정치 개혁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 씨가 집권하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해정 관청이었던 문무 합의 기구 비변사를 폐지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며 정치와 군사를 분리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은 자연스럽게 축출되었고, 많은 주요 인사들이 사직하고 좌천당했지만, 일부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은 본인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제도 개혁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그동안 세도가들이 일삼았던 백성들에 대한 횡포를 엄금하였다. '대전회통', '육전조례', '삼반예식', '종부조례' 등 다양한 법전을 편찬하여 왕권을 확립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 했으며, 화려한 사치를 금하였다.
또한 백성을 힘들게 했던 원인 중 하나였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 등을 실시함으로써 국가 재정 확보 및 백성의 민생 안정에 힘썼다.
지방 호족이었던 향리로 인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자 그들에 대한 통제 또한 강화하였으며, 조세 횡령에 대한 처벌을 강화, 지방관직의 매관매직 금지, 암행어사 파견 등을 통해 지방관리의 비리를 뿌리 뽑으려 했으며,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였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키가 작았던 흥선대원군은 기강 확립을 핑계로 길게 늘어뜨린 양반의 도포 자락을 짧게 자르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가 도포 자락 안에 뇌물을 숨겨 다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담뱃대의 길이도 자르도록 하고, 갓의 길이도 줄이는 등 다방면에서의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신복룡의 견해에 따르면 그의 제도개혁은 첫째, 중화사상의 탈피 및 자주 의지 확립에 있어 높이 살 수 있으며, 둘째,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권을 강화한 것, 셋째, 안민과 국제적 공존을 위하여 쇄국정책을 펼친 것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이에 대한 증거로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의 환영을 받았었다.
경복궁 재건
이렇게 다양한 제도를 개혁하면서 민생 안정을 꾀한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필요한 기금 마련으로 원납전을 강제 징수, 세금 인상, 특별세금 부과, 장정 징집, 춤꾼과 기녀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공연 개최 등 민생의 안정을 위협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원래 경복궁 중건은 헌종 때 계획된 것이었으나, 재정 부족으로 진행되지 못하였고 흥선대원군이 선왕의 뜻을 잇는다는 구실로 이를 강행한 것이다.
당시 부과했던 세금에는 원납전이라 불렸던 강제 기부금, 도성 사대문 통과 시 통행료였던 문세 부과, 당백전, 원납전 주조를 통한 공사비 조달, 재목 확보를 위해 곳곳의 무덤에 있던 나무까지 벌목하면서 "이것은 국가의 성스러운 일이니 그대 집안 선대가 영험이 있다면 필시 즐겨하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백성들을 경복궁 중건에 동원하는데 매우 신중을 기했지만, 다음 해 공사가 진행되던 다음 해 3월, 재목장에 큰 불이 나면서 중건 작업에 지장이 생기자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담당자였던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 하였지만 그들을 불러 크게 질책하며 불탄 목재의 원상복구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흥인군과 이경하는 목재를 구할 곳이 없다며 원죄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중건작업에 차질이 생기자 흥선대원군은 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다. 자금 조달을 위해 원납전 징수, 금지했던 매관매직의 재개, 당백전이라는 악성 화폐까지 유통시켰다. 심지어 거리에 병사를 풀어 사람들을 잡아 원납전을 받고 놓아주기도 했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이토록 집착한 것에는 의문이 있다. 당시 고종이 거주할 궁궐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없어진 부분만 새로 지은 것이 아닌 경운궁을 일부 헐어서 옮기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양반 세금 징수 및 국방력 정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으로 부족해진 재원 확보를 위해 호를 단위로 면포나 저포를 징수하던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들에게까지 세금을 징수하였다. 당연히 이로 인해 불만을 가진 양반들도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균일하게 세금을 징수하였던 것이다.
또한 1860년대 말,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열기구를 목격하고 군기감에 명하여 학우조비선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최초 학우조비선은 학과 두루미의 깃털을 아교로 연결하여 배가 포격당하더라도 가라앉지 않도록 할 목적이었으나, 배가 물에 닿자 아교가 녹으면서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삼군부 육성
흥선대원군은 삼군부를 부활시키면서 이들을 본인의 친위대로 양성하여 본인과 왕실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는 정치와 군사의 분리를 중요시했는데 그 이후에도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특별히 신경 썼다.
토지 개혁
흥선대원군은 당시 백성에 대한 횡포의 근원이었던 삼정(전정, 군정, 환곡)을 바로잡기 위해 토지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땅을 찾고 지역 토호와 유지의 토지 겸병을 금하며 토지조사를 통해 양전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았다.
환곡은 사창제로 개혁하며 합리적으로 운영하도록 유도하였고, 신설 궁방에 토지를 지급하는 것을 폐지하여 궁방전 또한 억제하였다.
서원 철폐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당시 오랫동안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저질러 오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병인박해
고종 1년, 아라사(러시아)에서 사신이 통상 요구를 위한 서신을 보내오자 이를 거절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병인박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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