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사도세자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탄생 및 세자 책봉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장헌세자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이복형이었던 효장세자가 일찍이 사망한 탓에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순간을 영조가 직접 지켜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빈 이 씨가 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낳았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중략)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종(三宗, 효종 · 현종 · 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영조실록
그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후궁의 소생으로, 생후 100일이 되어 중전 정성왕후의 왕자가 되었고, 형이었던 효장세자의 이른 사망으로 적자승계의 대상이 되었다.
세자 시절
그는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을 깨우쳤으며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진 매우 영특한 영재였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 영조는 본인이 무수리의 아들이었던 것에 대한 한이 있었기에 아들이었던 사도세자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매우 엄격하게 훈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어려서부터 소학을 비롯한 학문에 정진할 것을 세자의 도리라 가르치며 이에 따라 사도세자 또한 학문에 매우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 어린 시절에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매우 아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영빈 이 씨에게 칼과 칼집을 가지고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음에도 공부하였다 거짓을 고하는 등 거짓말이 심해지고, 이에 분노한 영조는 직접 세자를 찾아가 꾸짖기도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전쟁놀이를 했던 이상궁과 한상궁을 매우 심하게 벌하여 이들은 결국 형벌을 받다가 죽었고,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 매우 무서워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공포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청심환을 먹지 않으면 아버지 영조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하였고, 영조의 별 뜻 없는 말에도 곧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를 본 혜경궁 홍 씨는 이를 한중록에 공포증과 광증이라 기록하였다.
영조 25년(1749년)에는 대리청정하게 되었는데, 이때도 영조는 세자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그 명을 거두지 않고, 대리청정하는 동안 세자는 호통과 폭설을 견디면서도 그 책임을 다해 대리청정의 명을 수행하였다.
그는 대리청정하는 동안 한쪽의 의견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반대편의 의견도 일부 수용하는 등 참된 왕의 면모를 보였다. 한 예로, 이인좌의 난에 대해 소론 온건파는 이들의 처벌과 추탈을 요구하였지만 세자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각환곡을 형편에 따라 차등하여 부과하는 등 세금 제도를 개편함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가난한 백성을 힘들게 했던 대동, 군포의 대전, 방납을 엄히 금지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당시 사도세자는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750년, 정비 혜경궁 홍씨홍 씨 사이에서 첫아들 세손이 태어나고 이로 인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잠시 수그러드는 듯 보였다. 영조는 세손을 매우 아꼈고, 세자도 이를 기회 삼아 영조의 질책으로부터 잠시 해방되었다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어린 나이에도 매우 병약하였고 이 원인을 세자를 탓하기 시작하며 잠깐의 평화마저 깨지게 된다. 결국 첫 세손이 죽고 다시 시작된 갈등의 스트레스 속에 둘째 아들이 태어난다. 평소 매우 아꼈던 세손의 상중에 둘째가 태어난 탓에 영조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심지어 혜경궁 홍 씨의 출산을 도왔던 영빈 이 씨마저 탓할 정도로 둘째를 싫어하였는데, 세자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고, 이 둘째 세손이 훗날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이다.
난폭했던 사도세자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였을까, 1760년 이후로는 그의 폭력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혜경궁 홍 씨는 경진년(1760년) 이후로 세자가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 도무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내관과 나인 등 만만한 아랫사람 수백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폭력의 대상이 점차 확대되었다.
후궁은 물론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를 공격할 뿐 아니라 시강원의 스승, 생모 영빈 이 씨를 공격하기도 하며,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 우물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평양으로 탈출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현재로 따지면 각종 정신장애를 앓고 있던 세자는 그때부터 헛것이 보인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의 폭력성을 감당키 어려웠던 생모 영빈 이씨는 왕에게 세자를 벌하여 세자로부터 세손을 보호하자는 고변을 아래와 같이 전하였다.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 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쫓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 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영빈 이 씨의 고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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