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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정보/한국사 이야기

조선의 신데렐라, 장희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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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본명 장옥정은 조선 역관 출신인 아버지와 그의 계실 사이에서 난 딸로, 낮은 신분에 궁녀 출신으로 중전의 자리에까지 오른 일명 조선의 신데렐라이다.
많은 드라마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던 희빈 장 씨에 대해 이번 포스팅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생애 초기
희빈 장씨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 출신의 중인 집안으로, 조선시대 당시 그렇게 높은 지위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동복 오빠 장희재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명문가 자제만 들어갈 수 있다는 내금위에 재직하고, 종 6품 관직인 포도부장으로 있기도 하며, 다른 가족들도 뛰어난 역관으로서 재산을 쌓은 덕에 비록 사대부 집안은 아니었으나 재력이나 지위가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 씨의 입궁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존재한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입궁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전에 이미 사촌의 권고로 입궁했다는 얘기도 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 장 씨는 어린 나이에 궁인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고, 머리를 스스로 쌓아 올리기 전에 입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서 경신환국에 휘말린 가문을 위해 당시 권력투쟁 중이었던 남인들과의 결탁으로 입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그 당시 그녀의 나이가 22세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경신환국이 있었던 해에 장씨의 강제 출궁이 있었고, 7년 후 다시 궁인의 신분을 얻어 재입궁한 것에서 비롯된 오해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궁녀 장씨
장 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대왕대비이자 숙종의 증모 자의대비 조씨를 모셨다. 이때 장 씨가 자의대비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로, 장씨의 출궁 시 친필로 그녀의 출궁을 막고자 한 시도를 들 수 있다.
1680년, 숙종의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가 일찍 죽고, 장씨는 숙종을 모시는 궁녀로 일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인경왕후 사망 이후 혜성이 나타났는데 그때가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이고, 이는 장씨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만 보지 않았던 숙종의 어머니 대비 명성왕후 김 씨는 장 씨를 강제로 출궁 시킨다. 그 이유로 장 씨는 숙종을 모시기에는 그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나쁘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경신환국 당시 장 씨의 가문을 몰락시킨 장본인이 대비 명성왕후 김씨의 가족이었던 것으로 보아 대비는 장씨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장씨의 출궁 직후 숙종의 간택령이 내려지고 이때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 인현왕후 민 씨였다.
비록 대비에 의해 출궁 하였지만 자의대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 씨는 그리 어려운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장씨는 대왕대비 조 씨 덕에 보호받기도 했지만 재입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도 하였다.
천연두를 심하게 앓던 숙종을 위하여 무당의 권고대로 그의 모후 대비와 중전 민 씨는 절식하고 속옷 차림으로 냉수욕하며 신께 치성을 드리다 감기에 걸리고 이가 심해져 열병으로 사망하고, 대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대왕대비가 장 씨의 재입궐을 숙종에게 제안한다. 중전 인현왕후 또한 장씨를 그리워하는 숙종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장씨의 재입궁을 주도했다고 전해진다.

 



후궁 장씨
다시 궁으로 재입궐한 장 씨는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때 인현왕후가 장 씨의 재입궁을 주도한 것이 후회되었거나, 또는 그것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는지 인현왕후는 서인 영수의 증손녀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책봉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간택후궁을 들일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장씨의 입궁을 탐탁지 않아 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정명공주의 생일잔치에서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였던 좌의정이 장희재가 첩을 취객의 희롱에서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그를 매질하였는데, 좌의정이 직접 포도부장을 벌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뿐더러, 희롱한 취객을 문책하지 않고 그 첩을 도망치게 한 장희재에게 벌을 내린 것 또한 온당치 못한 처사였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런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인현왕후는 장 씨가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는 것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현왕후가 여러 차례 간택후궁을 들이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숙종은 서인과 인현왕후를 의식하여 회임은 고사하고 숙종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상황만 지속되었다.
뜻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자 서인은 당시 궐에 일어난 천재지변의 원인을 모두 장씨가 불길한 탓으로 돌리거나 여색을 멀리하는 것이 제왕 된 도리이고, 승은 상궁인 장씨가 아닌, 중전이나 후궁 사이에서 후사를 보아야 이후 왕위 승계 문제에서 탈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숙종이 아끼는 장 씨를 다시 출궁시킬 것을 간청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서인과 인현왕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 씨를 매우 아꼈던 숙종은 인현왕후와 후궁 김씨로부터 장씨를 분리하기 위해 중궁전과 후궁 처소가 있는 곳이 아닌 창경궁에 장 씨의 처소를 지어주고,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책봉하여 장씨는 정식 후궁이 되면서 서인은 더 이상 장씨의 출궁을 간청하지 못하게 된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명성왕후 김 씨가 꿈에서 장 씨가 원한을 품과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고, 남인의 사주를 받아 입궁한 불순한 사람임을 이유로 들어 직접 숙종에게 숙원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종용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장씨 사주에 아들이 없다는 미신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는데 이는 훗날 인현왕후가 폐비가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원 장 씨는 소의로 승격되면서 같은 해 왕자를 출산하여 이 아이가 훗날 경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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