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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정보/한국사 이야기

최초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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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 성균관에 대해 알아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조선 후기
갖은 노력에도 그 위상이 쉽게 자리 잡히지 않는 성균관을 위하여 역대 왕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비들의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인물을 성균관의 학관으로 임명하고자 하였다.
인조 12년에는 예조에서 '학교권장조목'을 올렸는데, 왕은 이를 허락하고 거행하도록 하였다.
현종 4년에는 유생의 학업을 권장하는 의미에서 고강과 시제를 다시 부활시켰고, 다음 해 우승자 5명을 선발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재가를 얻어 문과 초시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성균관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생겼다. 
현종 5년에는 비천당이 건립되고, 일양재, 벽입재가 신축되었으며, 숙종 27년에는 계성사가 세워졌다.
영조 18년에는 탕평비와 그 비각이, 다음 해에는 육일각이 세워졌다.
영조는 성균관 재건에 대폭적인 재정지원을 하고 여러 규정이 보완됨으로써 다시 부흥기를 맞을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당시 국가 경쟁력이 매우 상승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문예 부흥과 동시에 문물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이 일환으로 임진왜란 이후 쇠퇴기를 맞은 성균관 교육의 재부흥을 위하여 적극적인 교학 권장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영조는 각종 재원(쌀, 콩, 붓, 먹, 종이 등)을 강화하고 성균관 유생의 정원을 늘렸으며, 필요할 경우 선혜청미나 사섬목, 호조전, 병조포 등을 성균관에 하사여 이들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정조 때에는 문호가 많이 개방되었는데 서얼 출신의 생원, 진사들이 성균관에 입학한 것이 그 증거이다.
영조와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원의 확대, 과거제도의 비리, 학전의 감소 등으로 성균관의 교육 기능은 감소하기 시작한다. 일부 실학파 학자와 관리들이 학교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철종 때까지 제대로 된 개혁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종 6년, 성균관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정부에서 '태학별단서'를 발표하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단행하고자 하였으나 반발이 너무 거세어 이를 중단하였는데, 이 점을 미루어 보아 '태학별단서'는 성균관 위축의 원인이었던 서원을 철폐하고 성균관을 명실상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신미양요, 대원군 하야 등을 이유로 제대로 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육영공원과 같은 교육기관은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는 한편, 성균관은 그렇지 못하여 유생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고종 24년, 성균관에 경학원을 설립하였지만, 결국 재정 궁핍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근대
1894년 갑오개혁에서 조선 교육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었다.
우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과거제도를 폐지와 함께 성균관 입학 자격이 없어지며 인재 양성을 통한 관리 배출의 기능이 더 이상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해 고종 32년에 정부는 새로운 성균관 관제를 제정, 경학과를 설치하였다.
이후 성균관은 사서삼경 외에도 본국지리, 본국사, 세계지리, 세계사, 수학, 역사, 문화 등의 학문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1905년에는 관제의 폭넓은 개정으로 교수가 증원되고 박사가 3명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는 성균관에 경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성균관은 수백 년 간 어렵게 유지해온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일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경학을 강구하고 문묘에 제사를 지내며 재산을 관리하는 정도로써의 일만 담당하게 되었다.
심지어 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존경각의 고서 3만여권이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강제 이관되고, 해방 이후에도 이 도서들은 다시 환수되지 못하고 있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며 중등 이상의 학교가 다시 문을 열며 명륜연성소가 명륜전문대학교로 부활하였다. 이에 성균관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명륜당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였다. 천여 명의 전국 유림이 참석하여 이들은 유교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교의 설립, 이를 위한 재단의 설립 등을 결의하였다.
오늘날 성균관은 재단법인 성균관에서, 성균관 대학교는 학교 법인으로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다. 또한 성균관과 문묘는 국유재산으로 종로구청이 관리하며, 성균관대 재단은 삼성 재단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현재 성균관은 문묘향서, 성균관 및 유도회 유지 및 관리, 지방향교의 통합 관리, 유교 신문 발행 등 각종 유교 문화 활성화 사업, 봉사활동, 예절 상담 등을 통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는 법인이 분리되어 있을 뿐, 성균관 대학교가 성균관을 계승하였으므로 현재에도 많은 행사를 같이 주관하거나 후원하고 있다. 일례로 성균관대학교의 입학, 졸업식 때 대성전에서 행하며, 대학교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유례를 행한다. 

 



유생운동
성균관 유생들은 조선시대 최고 국립대학의 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집단으로 국정을 비판하거나 왕에게 상소하는 유생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역대 왕들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대제학 이하의 학자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고, 고관, 대학자가 거의 대부분 성균관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성균관 유생들은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자처하였고, 이교를 배척하였으며,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충정에 의해 집단으로 저항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때로는 당파싸움에 이용되기도 하고 보수적인 유교 사상으로 새로운 종교나 사상의 등장을 매우 배척하는 반동적인 역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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