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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정보/한국사 이야기

최초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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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성균관의 근원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고려 개경에 세워진 국자감이 성균감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즉위 이후 성균관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공민왕 초, 성균관은 기술학부도 교육하였으나, 이후 그것을 분리해 성균관은 오로지 유학의 교육만 전담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숭교방 부근(현재 명륜동)에 자리를 잡고 성균관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했고, 이로써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이 한양, 개성에 한 곳씩 존재하게 되었으며 정삼품 대사성이 최고 책임자였다.
성균의 의미는 음악을 조율하는 것처럼 어지러움을 바로 잡고 , 지나침과 모자람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진사시와 생원시라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우선적으로 성균관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이외에 성균관 선발시험이었던 승보, 음서를 통해서도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의 정원은 대체로 200명 안팎으로 미달시 사학생도, 유음적자, 소과초시 합격자, 조관등에서 인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생도들은 반드시 기숙사였던 '재'에 머물렀으며, 그 교칙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성균관 생도들의 자치활동이었던 재회라는 집회는 장의, 색장 등의 회장과 그 간부를 두고 이들은 재회를 선도하고, 학칙을 어긴 생도를 처벌하고 퇴학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또한 나라에 어지러운 일이 있을 때 연명 상소하기도 했는데 이를 유소라 하며, 이 모임을 대의사라 하였다. 유소시에는 궐문 앞에 연좌하여 왕의 언답을 기다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 식음을 전폐하는 시위인 권당을 행하고 성균관을 비우는 공관이라는 집단 휴학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도 했다.

조선 전기
태조는 성균관 건물을 건축하고, 유생들이 지낼 수 있는 재를 두었는데, 성균관이 완공되고 한 달 만에 왕자의난이 일어나 정종이 즉위하게 된다. 정종은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유생들의 교육은 개성의 성균관에서 실시하도록 하였다. 
태종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땅과 노비를 하사하고, 벽송연이 있을 때 술과 음식, 고기를 하사하여 이들을 격려하기도 하였으며, 왕세자를 성균관에 입학시켜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후 이것은 관습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또한 성균관을 한양으로 재천도하고 문묘를 재건했다. 태종 7년에는 명륜당을 중건,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동, 서 재의 수리 및 보완, 식당 건축을 행하였다.
세종 7년에는 동, 서 재를 온돌로 개조하였다.
성종 3년에는 전사청을 건축하였다.
성종 6년에는 존경각이라는 서고를 만들어 수 만 권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성종 21년에는 향관청을 정록청 북쪽에 세우고, 문묘 재건이 시작된 후 성종 시절이 모든 공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유학을 가르치는 기관으로서 성종 시절까지는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그 기능을 잘 수행하는 듯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학을 등한시하며 성균관을 비롯한 다른 유학 교육기관이 쇠퇴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연산군은 한글 벽보가 싫어 한글의 사용 및 학습을 금지하고 성균관 유생이 국정 비판 행위를 금지했으며, 이들을 벌하기도 하였다. 결국에는 성균관을 철거, 그 터를 사냥과 연회의 장소로 정하고 성균관 관원을 감축시켰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왕위를 계승한 중종은 연산군에 의해 쇠퇴한 성균관의 명성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연산군이 폐지한 교육 관례를 복귀시키고, 철거된 성균관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중종 12년에는 밭 100결을 성균관의 터로 하사하고, 이를 경작하기 위해 노비 80구를 주었으며 이를 성균관 교육 진흥을 위한 재원으로 쓰도록 명하였다. 이런 중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 특권층으로써의 지위를 누리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학문 탐구에 열중하는 것보다 조정에 출세하는 것이 더 좋은 수단으로 여겨져 학문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조정에 출사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에만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미미했다고 전해진다.
명종 때도 중종 때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유지했으나 정원이 미달되는 경우가 많았고 교육의 질 또한 매우 낮았다고 한다. 이렇게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4학이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에서는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그 세를 확장해 나갔다.

 

 



조선 후기
조선 중기에 부진했던 성균관의 명성을 다시 끌어올리고자 선조는 선비를 배양하는 사목을 만들 것을 이이에게 명했다. 이에 이이는 '학교 사목'을 정하여 올리고, 일종의 교육헌장인 '학교 모범'을 지어 미비한 점을 보완해 나갔다. 이렇게 선조의 지시 아래 성균관 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이가 2년 뒤 사망하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성균관 건물이 불타 없어지면서 조선시대 교육은 공백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1년 성균관 재건 공사가 시작되어 문묘시설, 명륜당, 존경각, 정록청, 식당 등의 부속건물이 차례로 완공되기 시작하였다.
성균관 재건의 바람에도 조선 선비들의 조정에 대한 출세 욕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선비들은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애썼고, 성균관 유생이 되더라도  학문을 연구하는데 힘 쏟지 않고 과거시험에 집중하며, 과거가 끝나면 성균관을 떠나버리기 일쑤였으므로 성균관에 남아있는 유생의 수가 20~60명 정도로 극히 줄어들고 그마저도 지방의 가난한 선비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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