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포스팅 아마 마지막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오군란과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1882년, 구식 군인의 임금체불로 인해 일어난 사건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의 기회를 얻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측근은 군인들에게 명성황후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명성황후는 변복을 한 상태로 도성을 빠져나가 결국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흥선대원군을 만난 민겸호는 목숨을 그에게 빌었지만 이를 무시하자 병사들은 그를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며 봉군의 추대를 받아 다시 입궐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사실을 알린 뒤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결국 고종에게 임오군란 수습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이를 시작으로 본인의 모든 권력을 되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민 씨 가문과 청나라가 내통하여 청나라의 군사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이홍장 무리에게 납치되어 청나라로 압송, 결국 재집권 1개월 만에 다시 실권하고 만다.
고종 폐위 기도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이었던 이재면이나 이재선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의 군인 원세계와 결탁하여 본인의 꿈을 이루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는 시도마저 수포로 돌아가지만, 흥선대원군은 결코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봉준과의 접촉
1893년, 전봉준은 한성부에서 흥선대원군과 접촉한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바"라고 말했고, 이를 보았을 때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비밀 계략이 오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고향 전라북도로 돌아간 전봉준은 동지들을 모아 강연을 다니며 인간의 평등과 탐관오리를 벌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 흥선대원군이 이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이라는 것을 알렸다. 이를 들은 백성들은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동학농민군들은 경복궁 앞에서 상소 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기회 삼아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고 본인을 복권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또 다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민 씨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과 흥선대원군의 결탁은 유지되었다.
명성황후 폐위 시도
갑오경장 초기,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폐서인하기 위해 일본 공사에게 본인의 측근을 보내 명성황후 폐위의 뜻을 전하고 이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여러 차례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3차 집권 및 이준용의 왕위 추대 시도
흥선대원군은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주도로 3차 집권하게 된다. 이를 틈 타 그는 역시 아들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일본은 그를 집권시켜 준 것이 본인들의 의도대로 조선의 정치를 움직이려 함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일본은 그를 다시 끌어내린다.
동학농민군과 이준용, 흥선대원군은 사전에 작전을 짜고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군대를 모으고 개화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일본 공사관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이 모든 사실을 안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의 사퇴를 요구하고, 조선 정부는 일본과 거래하여 흥선대원군의 퇴위에 동의하였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항일운동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며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준용 역시 1895년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고 만다. 박영효와 사광범 등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에게 아들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본 공사와 각국 영사들이 이준용을 선처해 달라 요구한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에 처해진 뒤 일본영사관의 영사로 임명되어 조선을 떠나게 된다.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수많은 왕위 탈환 시도가 좌절되며 결국 흥선대원군은 정계에서 퇴출되고 사실상 연금 상태에 들어가고 모든 외부 인사와의 접촉이 차단된다.
긍정적 평가
'대한제국멸망사'를 저술한 힐버트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거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운현궁의 봄'의 작가 김동인은 당시 세도가의 횡포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백성들의 아픔을 본인의 아픔으로 승화시킨 사람으로 평가했다. 또한 그를 사내대장부이면서도 반대 세력의 탄압을 피해 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일부 의견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정책으로, 다른 의견으로는 당시 일어났던 외세의 침략에 의한 수많은 사건들을 모두 이겨내면서 조선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부정적 평가
앞서 말했듯,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조선의 개화를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는 것이 차단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의 발전과 부흥이 매우 늦어졌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그가 단행했던 계획들이 왕권을 강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결과를 이루어 내긴 했지만 근본적 해결이 아닌 모두 일시적인 결과일 뿐이었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옳은 판단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복궁 중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분명 수많은 개혁을 통해 민생의 안정을 꾀하긴 하였으나,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경복궁 중건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일부 세력에서는 경복궁을 재건할 돈으로 병력을 키우는 데 투자했다면 과연 일제강점기가 왔을 것이냐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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