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은 지난번에 이어 연산군에 알아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갑자사화
연산군 재위 10년, 훈구파 내의 분란을 틈타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한 연산군은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당시 관료들을 살아있는 자는 처형을, 사망한 자는 부관참시하였는데 이 사건을 갑자사화라 한다.
성종 당시 일부 사림파는 폐비 복위를 매우 반대했고, 임사홍 등의 궁중파는 갑자사화를 발판 삼아 사림파와 그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 숙청, 폐비 사건과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 부중파 또한 숙청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을 부관참시하였다.
또한 폐비사태를 주도하였던 후궁 소생인 안양군, 봉안군을 때려 죽이라 지시하고, 그 시신을 젓갈로 담가 산야에 버려 매장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 다른 두 왕자는 유배를 보내 일 년 뒤 죽이고, 후궁 소생인 두 옹주(정혜옹주,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그들을 유배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 두 옹주는 중종 즉위 후 다시 복위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와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는데, 훗날 폐비 윤 씨의 복위 문제로 다투다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치고 이후 인수대비는 사망하였는데,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을 삼년상 대신 25 일상으로 치르도록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는 이일역월제를 단행하여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연산군에 대한 오해
연산군이 유흥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궁궐 주위 민가를 없애고 사람들을 쫓아내 수많은 철거민을 발생시켰다고 중종실록에 전해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연산군일기에 연산군이 명령한 것을 보면, 궁궐에서 100척 이내에 민가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므로 이 민가들을 철거하라 명하고 당시 겨울이었음을 감안하여 집이 철거당한 철거민들에게 집터를 제공하고 그 등급을 나누어 무명을 차등 지급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후 겨울에 철거를 단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연산군은 다시 명령을 내려 봄까지 기다렸다가 철거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법 민가의 철거에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고, 철거민들의 이후 생계까지 고려하여 시기를 조정하는 등의 명령을 내린 연산군의 행보를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증거로 삼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산군은 서총대라는 유흥장을 만드는데 수많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바치게 하는 등 노동력과 자산을 수탈하여 민심이 돌아섰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연산군은 채정사, 채홍사를 통해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이는 반정 측이 연산군을 깎아내리기 위해 꾸며낸 것으로 추정된다.
큰어머니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는데 당시 박 씨와 연산군의 나이를 보았을 때 이 또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꾸며낸 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계획이 성공적이었는지 당시 연산군과 박씨박 씨 사이에 온갖 추문이 있었다. 이들이 간통했다는 추문, 박 씨가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문, 심지어 야사에서는 연산군에게 성병이 전염되어 자결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 모두 사실관계를 따져보았을 때 모두 거짓 주장으로 판단된다.
한글 사용 탄압
연산군 10년, 그의 패륜 행위를 고발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명분 삼아 한글로 된 책을 불태우고 이를 배우고 쓰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위반한 자는 임금이 발행한 문서를 망가뜨린 죄를 다스리도록 만든 법인 기훼제서율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참수형에 처하는 형벌을 내렸다. 또한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임금의 명을 위반한 자를 다스리는 법인 제서유위율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의 형벌을 내렸다고 한다.
중종반정을 통해 결국 폐위된 연산군과 그의 최후
1506년 9월,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연산군의 측근을 살해하고 궁궐을 장악하여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벌였다. 이때 연산군은 근처 민가에 은신했다가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어 그 즉시 폐위당하고 강화도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이때 장녹수 등 연산군의 후궁들은 한성부의 각지에서 투석사형당했으며, 어린 아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강화도로 유배된 연산군을 독살하려는 시도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한때나마 그를 동정했던 강화 부사의 덕분에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던 중종은 연산군의 아들들(중종의 조카)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사형을 반대하였지만, 훗날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모일 것을 염려한 대신들이 이를 강력하게 반대함으로써 결국 이들도 처형당하게 된다.
당시 교동도로 이배된 연산군은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배된 지 2달 만에 병을 앓다가 그 후유증으로 연산군은 향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 민가에서는 그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사망 직후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 씨가 지냈고, 중종은 왕자군보다 높은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을 주장했는데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의 묘는 강화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1512년 발생한 홍수로 그의 묘가 침식되었고, 부인 신 씨는 묘를 양주 해촌으로의 이장을 요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의정 궁주 조 씨의 묘 위편에 이장되어 왕자군의 예를 갖추어 장사되었다고 한다.
'자격증 시험정보 > 한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초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 2 (0) | 2023.04.11 |
---|---|
최초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 1 (0) | 2023.04.11 |
연산군은 왜 폭군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1 (0) | 2023.04.11 |
조선 건국의 주역, 태조 이성계 2 (0) | 2023.04.10 |
조선 건국의 주역, 태조 이성계 1 (0) | 2023.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