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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정보/한국사 이야기

조선의 신데렐라, 장희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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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도 장희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숙종과 서인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사건 중 옥교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옥교란 덮개가 달린 가마로, 당시 국법상 3품 이상인 당상의 모와 처만 탈 수 있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당시 천하다고 여겨지는 역관 출신의 처이자 장 씨의 모후인 윤 씨가 이것을 탄 것이 엄연한 불법이라는 상소가 숙종에게 전해졌는데,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장소의의 어미는 곧 당하관(堂下官)인 역관(譯官)의 처(妻)이니,
교자(轎子)를 타는 것도 이미 참담하다고 할 것인데,
교자에 뚜껑이 있는 것은 더욱 참담한 것이니,
법을 지키는 관원이 이를 알면 마땅히 금지할 것입니다.
-숙종실록

하지만 이 법은 이미 문서화된 지 오래였고, 가마를 타고 다니는 것이 여인은 얼굴을 드러내고 밖을 다니지 않는다는 조선시대의 관습상 대부분의 부녀자가 옥교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궁을 출입하던 무당마저 옥교를 타고 출입했으니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억지였는지는 뻔한 것이었다.
이 상소는 장씨를 출궁 시키려고 시도하는 서인들의 주장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숙종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이 문제 삼은 장 씨 모후의 옥교사건은 후궁 해산 시 그의 모후는 교자를 타고 입궁한다는 왕실 규례에 따라 숙종이 내린 어명으로, 이를 문제 삼고 이를 쫓아낸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해당 관원들을 잡아들여 사형시킬 것을 명하며, 이들과 함께 선동된 자들도 엄벌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강력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은 갖은 이유를 들며 장씨의 모후는 이후로도 옥교를 탈 수 없게 함과 동시에 가마에 대한 법 개정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라는 주장을 계속 펼치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숙종은 후궁 소생이었던 왕자를 왕의 큰아들이라는 뜻의 원자 명호를 내리고 장 씨를 빈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 씨보다 높은 후궁 서열 1위로 올라서게 하였다. 또한 승정원, 사간원 등 요직의 곳곳에 있던 서인의 지위를 박탈하고 남인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남인 중심의 조정을 꾸려나간다. 뿐만 아니라 장 씨의 3대 선조를 정승으로 추대하고, 그의 가족들의 품계를 상승시키며 장 씨가 더 이상 천한 역관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도록 조치하는데 이런 일련의 사건을 기사환국, 기사사화라 한다.
조정의 요직이 남인으로 교체되자 그들은 서인들과 반대로 원자 책봉에 대한 축하의 뜻을 비쳤다. 이는 남인이 조정에서 물러난 계기였던 경신환국에 대한 복수극의 시작으로, 당시 서인의 주요 인물들을 유배, 참수시키고, 귀인 김씨마저 작호가 삭탈되고 폐출되었다.
그다음 날, 중전 민씨의 생일에 대왕대비의 국상을 이유로 생일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음에도 불구, 생일 의식은 국모의 권한임을 이유로 들어 이를 무시하고 생일 하례가 진행되었다. 이에 분노한 숙종에게 틈을 놓치지 않는 남인은 중전을 교사스럽고 간특한 중전이라 말하며 평소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국모로서의 기본적인 자질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들 뿐 아니라 일부 남인들조차 수긍하지 못하고 반발하고 나섰는데, 숙종은 이들을 엄벌에 처하고 조정에 얼마 남지 않은 서인들마저 축출시킴으로써 남인이 조선 조정을 독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전 장씨
결국 숙종은 중전 민 씨의 갖가지 언행을 꼬투리잡고 이를 만천하에 공개하여 폐비하였다. 민씨의 죄명은 죽은 대비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장 씨의 팔자를 핑계로 왕이 노력하여도 왕자를 얻지 못할 것이라 한 죄, 장 씨에 대한 투기로 조정 내 갈등을 불러일으켜 국정을 어지럽게 한 죄, 붕당을 일으킨 죄였다. 
민 씨가 폐서인 된 후 숙종은 새로운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 서열 1위였던 장 씨를 왕비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후궁이 국모의 자리에 오르고, 그 소생이 적자승계의 정통성을 얻게 된 사건이었다. 

다시 후궁으로 강등된 장씨
숙종 20년, 조정에 다시 서인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였던 갑술환국이 발발하면서 숙종은 장희재를 구속하고, 폐비 민 씨의 사가에 호위를 붙였다. 그리고 폐비 민 씨가 스스로 반성하고 있으며, 두 대비의 삼년상을 모두 함께 지낸 아내였으므로 폐비한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는 것을 인정하며 민씨를 중전으로 복위하고 중전 장씨의 왕후새수를 거두고 희빈의 옛 작호를 내어주었다. 

민씨가 복위되고 몇 년 후, 사가에서 생긴 지병을 앓고 있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세자의 모후였던 희빈 장 씨를 다시 중전에 복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조정이었다면 이는 당연한 순서였겠지만 당시 붕당의 상황과 숙종 모두에게 그것은 매우 경계하여야 할 일이었다.
그 당시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의 편에 있던 후궁 숙빈 최 씨가 있는데, 그녀는 희빈 장 씨가 인현왕후를 시해하기 위하여 미신을 사용하여 중전을 저주했다는 사실을 고했고, 희빈 장씨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병에 걸린 세자 윤을 위한 굿이었다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었는지 아닌지는 현재까지도 의혹이 많다고 하는데, 실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희빈 장씨가 중전 민 씨를 저주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사건으로 숙종은 유배 중이었던 희빈 장 씨의 오라비 장희재를 사사할 것을 명했고, 희빈에게는 자진할 것을 명함으로써 화려했던 조선의 신데렐라 희빈 장 씨, 장옥정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비록 죄를 짓고 자진한 희빈일지라도 숙종은 옛정을 생각하여 그 죽음에 대한 예우는 갖춰졌다고 하는데 인현왕후전에는 장 씨의 주검 수습 장면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장씨의 주검을 누가 정성으로 수습하겠는가.
피 묻은 옷에 휘말아 소금장을 덮어 궁 밖에 내어 방안에 누이고 임금의 명을 기다려 염을 하려고 하는데 
염장하라 하시므로 들어가 입관하려 하니 하룻밤 사이에 신체가 다 녹고 검은 피가 가득하여 시체가 뜨게 되었으니 
정형을 받은 것만 못하였다. 
-인현왕후전

 

 


이후 중전으로 대두된 후궁 숙빈 최 씨가 있었지만, 숙종은 희빈 장 씨의 비극적인 사태를 본보기 삼아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새로운 국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중전이 간택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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