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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정보/한국사 이야기

조선 독립의 영웅, 안중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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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토리맘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운동가의 대표주자,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들어지고, 대한민국 독립하면 언제나 소개되는 인물인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 시도 사건으로만 거의 알려져 있는 그의 행적에 대해, 그가 걸어온 삶을 더욱 정확하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안중근에 대해 알아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 포스팅의 주제를 안중근 의사로 정하였다.
그 누구보다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그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 스토리를 듣게 된다면, 그의 위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상징인 넷째 손가락이 잘린 그의 손도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그에 성공하면서 그가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거사에 임했는지 등 그의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시도한 안중근 의사,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대한민국의 독립에 어떻게 기여한 인물일까?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태어난 배경
1879년 9월 2일,  가슴과 배에 7개의 사마귀가 있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를 본 부모님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았다는 뜻의 '응칠'이라는 아명을 지어준다.
이 아이가 바로 안중근으로, 무인가문의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무인 출신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였고 그런 집안 덕에 경제적으로 넉넉했으며, 총, 말타기 등을 어린 시절부터 즐겨했고 특히 사격에 소질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황해도 양반 가문의 김아려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 해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무신 집안이었던 그 아버지 안태훈은 당시에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동원하여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도 하였고, 이후 펼쳐진 농민군 진압 작전에 안중근 역시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로써는 의아하다 생각될 수 있지만, 당시 안중근의 입장에서 동학 농민군은 나라에 불충을 저지르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혁명이 아니라 반란으로 그의 눈에 비춰졌던 것이고,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 진압작전 당시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 농민군이 비축해 놓았던 곡식을 탈취하여 그가 거느린 병사들의 군량미로 사용한 적이 있는데, 반란이 진압되자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이 사실을 알고 그것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빌미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싸운 그를 반역죄로 몰아갔던 탓에, 그는 오늘날의 명동성당인 종현성당에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아버지 안태훈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이를 가족들에게도 전파하여 안중근 또한 천주교를 향한 신앙심이 깊어지게 되었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기도 하였고, 안중근의 호인 도마는 이 세례명 토마스의 한자식 발음이기도 하다.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국제정세에 눈을 뜬 안중근, 그는 아버지에게 중국 상해로 가족이 이주를 할 것을 제안한다. 
그 당시는 대한민국의 외교권이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시점으로, 일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한 안중근이 나라를 지킬 방법으로,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해에서 나라를 구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상해로 이주하는 것은 매우 큰 위험부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본격적으로 상해 이주를 준비하기 시작한 안중근은 상해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본인의 포부를 밝히고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안중근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집안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삼흥학교를 설립, 교육 운동을 시작한다.
1907년에는 전국단위로 개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그마저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고 만다.

 



의병 안중근
1907년, 헤이그 특사의 무산과 그로 인한 고종 황제의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해산 등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이에 안중근 또한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황해도 의병대에서 의병 단원으로써 활동하다가 직접 의병부대를 이끌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계동 청년회에 가입하여 임시사찰단에 선출되기도 한다.
그의 의병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본군과의 전투는 여러 차례 승패를 겪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군 포로를 대하는 문제에 있었다.
함경북도 경흥군의 야산에서 일어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그들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중근으로 인해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한 패배를 겪고야 만다. 그 당시 안중근은 잡아들인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의거하여 석방해 주었는데, 그 당시에도 다른 의병대원 간에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이 문제로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의병의 신임을 잃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지만 그곳에서도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고 의병부대는 결국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의병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라는 단체를 설립, 넷째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로 의지를 다졌으며, 그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수인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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