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까지 총 4번에 걸쳐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임진왜란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결국 쫓겨난 비운의 왕이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해군의 탄생
선조의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은 위로 임해군이 있었고, 처음에는 아버지 선조의 냉대를 받아왔지만, 왕위 계승자로서 적합하지 않았던 형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 역시 적자승계의 대상이 아닌 상태에서 왕위를 계승받았기 때문에 본인의 후계자는 적통 승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있어서 광해군을 세자로 삼기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한다.
세자 광해군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세자책봉 문제가 미뤄졌었는데, 신성군이 피난길에 사망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세자책봉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자 선조는 미루고 미루던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결정하였다. 이때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선조가 피난길에 올라 있는 와중에 한양을 지키며 전란을 수습하기에 나선다.
중전 의인왕후가 사망하고 다음 중전 인목왕후가 적자였던 영창대군을 출산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한다. 본인이 서얼에 방계승통을 했던 열등감에서였다. 하지만 왕이었던 본인이 나라를 버리고 피난 가 있는 동안 나라를 지킨 광해군이 쌓아온 신뢰를 깨고 세자에서 폐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명나라마저 광해군의 세자 승인을 거부하고 당시 정권을 지배하고 있던 북인들도 광해군의 세자책봉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1608년, 지병이 매우 악화된 선조는 나이 어린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받기 어렵다 판단,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는 교지를 내렸는데,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반대했던 유영경이 이 교지를 본인의 집에 숨겨 이후 발각되어 처벌될 뻔했지만 처결이 정해지지 않은 와중에 선조가 사망하여 흐지부지되고 만다.
선조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자 결정은 인목왕후에게 넘어가고,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즉위, 인목왕후가 수렴청정할 것을 제안하지만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즉위시킨다.
1608년,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이 된 광해군
즉위 초기 광해군은 정당을 고루 등용하기 위해 북인에게 밀려난 남인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였으며, 당쟁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광해군이 왕이 되기 전, 영창대군을 적극 지지했던 유영경은 결국 처형되었으며 소북파 역시 그로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또한,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며 재야에 묻힌 실력 있는 선비들을 관직에 등용하고자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본인은 임진왜란에 반대했다는 것을 이유로 광해군에게 수교를 요청해 왔다. 광해군과 조정 대신들은 이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한 끝에 조선에 유리한 내용으로 수교를 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추진하게 된다.
광해군은 그 조건으로 수교에 대한 국서를 일본에서 먼저 보낼 것, 임진왜란 때 선왕 및 왕가의 무덤을 훼손한 범인을 조선으로 인도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수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1618년, 만주의 여진족이 그 세력을 확장하여 후금을 건국하자 광해군은 군사적 방어 요충지로 생각했던 파주로 수도를 이전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는 못하고, 후금을 견제해 북방의 국경 방어에 힘쓰기 시작한다.
1619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조선도 이에 응해 원군을 보내지만 잇달아 패배하여 조선군 2/3이 죽자 결국 후금에 항복,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서를 후금에 전하면서 명나라 원조는 조선의 뜻이 아니었음을 그들에게 알리기에 나선다.
이런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나라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인 세력은 이를 배은망덕한 짓이라며 광해군을 비판하기에 나선다.
국방을 강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쓴 광해군은 이를 위해 궁궐을 지으면서 조선 경제가 어려워지게 된다. 그는 선혜청을 두어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게 하는 조세개혁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의 재건과 더불어 인경궁 건설을 진행하고, 임진왜란 당시 소멸된 서적의 간행도 서둘러 진행하였다.
이때 완성된 서적들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홍길동전', '동의보감' 등이 있다.
왕권 강화
즉위 초 광해군은 본인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형이었던 임해군을 유배하여 사형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을 사형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유일한 친형제였던 임해군을 죽인 광해군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는 관료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은 본인의 이복동생이자 왕위 후계자를 다투었던 영창대군을 유배, 방에 가둔 채 매우 뜨거운 열기로 그를 죽이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까지 폐서인, 자결하게 만들면서 본인의 왕권 계승을 위협했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기에 나선다.
이는 광해군에게 반발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처사들이었고 훗날 인목대비를 폐비, 서궁에 유폐시키면서 반발심은 더욱 커져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인조반정
1623년 서인의 주도하에 남인과 합세하여 인조반정이 발발한다. 이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 광해군을 폐위한 후 폐비, 폐세자, 폐세자빈 모두를 강화도에 유배, 결국 탈주를 시도하다 광해군과 함께 유배 보내진 주변 인물들이 자결을 하면서 광해군은 화병을 앓게 된다.
결국 광해군마저 1641년 독살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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